*.도계서원, 국문학 대가에 비해 너무 초라해
어렵게 찾아간 도계서원은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 위치한 도계서원이 너무 초라하게만...
도계서원은 조선중기 가사문학의 백미로 일컫는 노계 박인로 선생의 서원
조선시대 윤선도,송강 정철과 함께 3대작가중의 한사람이다
박인로의 일생 중 전반기에 대한 기록은 학문의 연마 정도와 교우관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미비한 향반의 후예일지라도 "이 세상에 남길 만한 이름은 효도·우애·청백이며
가슴속에 간직한 것은 충과 효 두 글자"라 하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실현하는 전형적 사대부의
삶을 추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좌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들어가
그의 명으로 〈태평사 太平詞〉를 지었는데, 긴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을
"들판에 쌓인 뼈는 산보다 높고 큰 도읍, 큰 고을이 여우굴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또 자신의 시대를 여전히 임금의 덕화(德化)가 두루 미치는 태평성대로 인식하고 전쟁 동안 소홀히 했던
오륜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39세 때 문과에 급제해 조라포만호(助羅浦萬戶)로 부임, 41세 때 이덕형을 향리에서 만나〈조홍시가 早紅枾歌〉를
지었다.
45세 때 부산의 통주사(統舟師)로 부임해 〈선상탄 船上嘆〉을 지어 무인다운 기개와 자부심을 표현했다
조홍시가(早紅枾歌)
.
1.소반의 조홍감이 곱게도 보이는 구나
유자가 아니드라도 품을 만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합니다
2. 옥상에 리어낙고 맹종의 죽순 것거
감든 말이 희도록 노래자의 옷슬 닙고
일생에 양지성효를 증자같이 하이라
3. 만균을 늘려내야 길게길게 노흘꼬아
구만리 장천에 가는 해를 자바매어
북당의 학발쌍친을 더듸 늘게 하리이다
4. 군황 모다신듸 외가마기 드러오니
백옥 사흰 곳애 돌 한아 갓다마는
두어라 봉황도 비조와 유사하니 뫼셔논들 엇더하리
위의 시는 선조때에 박인노 선생님께 연세 40세때에
쓰신 {조홍매가}의 일절이다.
구구절절이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자녀된 도리를
쓰신 선생님의 마음이 흘러 나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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